2022 Exhibitions
<터무니> 정명국 개인전
2022. 9.22 ~ 11.06
고요히 수런거리는 흔적들
박은희, 비아아트 대표
‘터무니’는 터의 무늬를 뜻한다. 건축물의 주춧돌처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흔적을 알려주는 말이다. 우리는 주로 아무 근거가 없을 때 ‘터무니없다’라고 한다. 어떤 공간이나 사람을 아는 데에 ‘터무니’를 마주하면 그 장소의 역사나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도움이 된다. 고대 로마 시대 폼페이의 흔적, 더 거슬러 올라가서 선사시대 동굴 벽화에 남겨진 흔적으로 학자들은 이론을 도출한다. 폼페이의 흩어져 남겨진 흔적에 과학 기술과 예술을 융합하여 폼페이의 영화로운 시절을 3D 영상으로 재현해 내기도 한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근거가 되는 흔적(터무니)에 기인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터무니> 전시는 흔적, 근본을 대하는 태도를 근대 산업 문명의 산물인 자동차와 이 자동차를 소유한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전시 작품의 소재인 지프 체로키(Jeep Cherokee)의 소유자는 50대 초반부터 80대 중반까지 30년 동안 이 차를 몰고 다녔다. 중년의 가장이 점점 나이가 들면서 노쇠해지고, 자신의 동반자로 아끼며 대한민국 여러 곳을 다니며 함께 했던 자동차에 대한 애정과 생각이 작가에게 전해졌다. 어떤 자동차든 30년 동안 몰고 다니면 차가 낡고 닳아서 이곳저곳 수리할 곳이 여럿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순간이 오면 흔히들 수명을 다했으니 폐차해야겠다는 결심이 서기 마련이다. 안전 문제와 수리, 유지비를 고려하면 새로 차를 구입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계산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이 차는 나와 함께 할 것이다.” 라는 팔순이 넘은 소유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 차를 어떻게 떠나보내는 것이 좋을까? 라는 물음에서 정명국 작가의
정명국 작가는 독자적인 작업을 한다. 자동차를 프로타주(frottage) 하는 유일한 작가라고 여겨진다.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한 작가는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회적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사연이 녹아 든 자동차를 조사하고 연구한 후 차주를 설득하여 창작하고 있다. 78년 모델 포니, 포니 픽업트럭, 1980년대 대중교통 버스, 10년 넘게 실험과 연구를 거처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 스포츠카인 ‘스피라’ 등 시대상의 흔적이 남겨진 자동차를 예술 작품으로 완성했다. 상상해 보자. 수십 명을 태운 큰 버스의 사방 표면에 종이를 대고 흑연으로 끊임없이 반복한 시간과 그 손놀림의 과정을. 작업을 대하는 성실함과 예술가의 창작에 대한 열의가 가히 충만하게 축적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협업하는 작가 없이 작가 스스로 혼자서 작품을 완성해낸다. 정명국 작가는 이런 특유의 열정과 집요함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전시로 이어오고 있다.
프로타주는 우리가 어릴 때 동전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쓱쓱 문질러 대면 동전의 문양이 배어 나오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를 자동차라는 존재의 외형과 내면(소유주나 시대의 이야기)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쓰고 있다. 작업의 소재인 자동차에 직접 종이를 대고 문지르는 방식이야말로 대상과 직접 소통하며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최소화한다. 자동차 겉면의 금속 느낌은 반복된 흑연의 제스처로 실제보다 더욱 빛난다. 자동차나 이 차와 연관된 사람들의 흔적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이어진다. 실크스크린이나 드로잉, 콜라주로 재구성하여 최종 작품을 완성해 내는 것이다. 작가의 주관적 개입과 예술적 의미 부여가 이 과정에서 녹아 든다. 이런 일련의 작업 과정은 판화를 전공한 작가의 경험이 축적되어 나온다고 본다. 석판이나 동판이 자동차의 표면이 되어 종이로 눌러서 이미지를 찍어내듯이, 기본 프로타주 방식 자체는 판화의 찍어내기 과정이다. 그리고 후에 이어지는 2차 작업은 예술 표현 방식의 여러 과정과 방식이 접목되는 것이다.
<터무니> 전시는 3부분으로 구성된다. 갤러리의 쇼윈도, 1층과 지하층 전시로 구분해서 작품이 설치되었다. 자동차 소유주의 가족과 함께 공동 작업한 작품이 쇼윈도에 전시되고, 1층 전시실에는 차체의 일부분(차 문이나 엔진)을 여러 시각과 각기 다른 표현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 네 점이 선보인다. <소통의 문> 작품은 운전자가 늘 여닫은 운전석 문의 안쪽을 프로타주와 실크스크린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운전자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은 부분에 30년 세월이 들어있다. 지프 체로키 1993년도 광고 문구를 반사필름에 실크스크린으로 표현하고 노랑, 분홍, 파랑, 검정 등 여러 색을 action painting 방법으로 표현했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화려한 색감이 등장한 작품이다. 10장의 한지를 연결하여 완성한 <휘익 마이카> 작품은 자동차의 한쪽 면을 타원형의 바탕에 흑연으로 프로타주 한 작품이다. 흰색 한지에 여러 각도의 타원 모양과 그 안에서 스며든 체로키 차체의 모습은 타원 곡선과 체로키의 직선이 돋보이는 디자인으로 묘하게 결합된다. 마치 자연의 곡선과 인간의 직선이 마주한 조화로운 질서를 보는 듯하다.
지하층에는 체로키 차체의 앞면과 뒷면, 좌측과 우측 모든 4면을 실제 크기로 프로타주 한 작품이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운다. 갤러리 지하층의 폭이 좁은 것이 아쉽기는 했으나 작가의 작품 설치 구성이 이 점을 옅게 만든다. 자동차 각 옆면을 작업화한 <마이 라이프 1>과 <마이 라이프 2> 작품 두 점이 지하 전시장 중앙에 비스듬히 설치되어 관람객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4미터가 넘는 작품 두 점이 양쪽으로 걸려있는 그 사이로 들어 가면 작품의 뒷면을 볼 수 있으며, 제주의 야자수를 그린 회화 한 점과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자동차가 30년 동안 있었던 제주와 섬 제주의 이미지를 야자수로 상징하고 있다. 야자수 회화를 등지고 나오면서 자동차의 앞면을 표현한 <직진>을, 지하 전시장을 나오면서 보게 되는 뒷면의
30년 동안 제주에서 체로키 자동차를 운전한 소유자의 이야기와 그 가족의 희로애락 삶의 흔적을 정명국 작가는 담담한 프로타주 제스처로 풀어냈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떠나보낼 때, 잘 이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일 어깨 위에 작은 새를 올려놓고 오늘이 그날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작품 전시로 짚어보고자 했다.
정명국 작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