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Exhibitions
이진아 개인전 <스미다> , <Imbued> Jina Lee
2016. 7.20-8.28
이진아는 호흡이 느린 작가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의 작가 데뷔가 그러했고, 2005년 갤러리 팩토리에서의 첫 전시 이후 드문드문 보여준 전시 행보를 봐도 그러하다. 작업의 방식은 또 어떤가? 작가가 주로 다루는 매체인 손뜨개는 한 코 한 코 이어가는 절대적인 물리적 시간을 필요로 하며, 기계나 다른 이의 손을 빌릴 수도 없고 그 반복적이고도 지난한 과정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 그러한 작가가 삼 년 만에 제주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스미다'는 다양한 형태의 설치 작업으로 구성되며 사물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지닌 '수집가'로서의 자아와 공간과 장소에 반응하는 '여행자'로서의 두 자아가 맞물려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 감정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작가의 수집벽은 대단하거나 진귀한 물건들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만난 사소한 생활 속의 것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감정의 촉발을 일으키는 물건들을 향해 있다. <버릴 수 없었던 것들>은 작가의 생활 공간 한 켠을 채우고 있던 물건들 중 깨지고 부서지거나 소용을 다한 것들을 뜨개실로 감싸 안은 작품들로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작가의 심리가 투사된 작품이다. 50년 된 북아현동의 친정집이 재개발로 허물어지는 사건이 제작의 동기가 된 <북아현동_라지에이터박스> 또한 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흔한 도시개발의 사례였지만 작가의 유년기와 청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을 상실하는 경험은 작가에게는 적잖은 심리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수십 년간 집의 일부였던 여러가지 사물들 중 유독 작가의 눈에 띈 것은 바로 라지에이터박스였는데, 어떤 존재감도 없이 그 자리에 영원히 있을 줄로 알았던 낡은 라지에이터박스를 작업실로 가져온 작가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복잡한 선형 구조의 박스들을 뜨개로 캐스팅 해나갔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의식과도 같았던 이 과정을 자신의 신체성과 더욱 적극적으로 결부시키려는 시도로 작가는 라지에이터박스를 덮었던 분절된 뜨개물을 목도리 형태로 만들어 몸에 걸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하였다.
작가에게 있어 뜨개라는 매체가 갖는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 <손수건_마음닦기>는 얼기설기 짜여진 뜨개뭉치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 가만히 앉아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감정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적 심정을 추스리기 위해 목적 없는 뜨개질을 이어간 결과인 이 뭉치들을 관객들은 직접 만져 볼 수 있으며, 뭉치의 촉감과 만지작거리는 행위 등을 통해 어떤 위로의 에너지를 전달 받을 수 있기를 작가는 희망한다.
일 층 전시장의 한 벽을 채우고 있는 <호치민_크리스마스트리>는 몇 해 전 베트남 호치민에서 레지던시(작가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특정 지역에서 작업이나 예술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기간 중 제작된 작품이다. 호치민이라는 지역에 머물며 도시의 삶을 밀착된 시선으로 들여다 봤을 때 작가는 도시의 독특한 색감에 주목하였다. 개발도상국의 색이라고도 하는 에머랄드 그린. 식당이건 시장이건 호치민 사람들의 생활 공간에서라면 누구든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에머랄드 그린색의 바구니들을 수집하고 그 위에 흰색의 실을 덮어나간 작가는 이 바구니들을 통해 소박한 일상 속에서 발견한 축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호치민에서의 레시던지가 계기가 되어 여행지에서 만난 다양한 삶의 모습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고자 했던 작가는 '여행자'가 되어 지난 몇 년 간 틈이 날 때마다 길을 나섰다. 관광책자에 나오는 이미지가 아닌 그 지역의 원형의 이미지를 만나기 위해 같은 지역을 여러 번 반복해서 찾거나 오키나와와 같은 섬들에 매료되어 보길도, 굴업도 등 국내외 섬들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규슈_장갑> 작품과 같이 여행지에서 발견한 오브제들을 뜨개 작업과 연결시키며 작품의 주제나 소재에 있어 자연스러운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지하 전시장에는 어두운 조명 속에 파란색의 플라스틱 물신들이 가지런히 정렬된 대형 설치물 <제주_물신>이 있다. 육지에서 '주방화'라는 이름으로 물이 많은 작업장에서 신는 싸구려 신발로 인식되는 이 신발들은 제주에서는 시장 어디서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일상의 용품이다. 제주의 본래 모습, 사람들의 삶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그 무엇을 포착하고자 했던 작가의 눈에 육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다양한 디자인으로 제주인의 미감을 반영하는 물신들은 매력적인 오브제로 다가와 작가의 오랜 수집벽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물신을 직접 신고 제주 여러 지역의 수많은 시장과 오일장을 돌아다니며 물신들을 수집한 작가는 뜨개와 비슷한 그물망 구조를 가졌으며 제주 지역에서만 사용된다는 또 다른 오브제인 마늘망으로 거대한 방을 만들어 그 속에 물신들을 숨겨 놓았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물신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제주의 정서, 현대사의 굴곡을 관통하였으나 그 아픔을 쉬이 내놓거나 하지 않는 제주의 다층적인 감성을 형상화한다.
작업의 대상이 되는 오브제나 장소를 발견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서적 공감을 시도하는 작가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느린 호흡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뜨개라는 매체는 어쩌면 이러한 작가의 속성에 딱 맞는 속도감을 지닌 것일 지도 모르겠다. 라지에이터박스, 플라스틱 바구니, 신발 등 각각의 사물들이 가진 물성과 뜨개실의 물성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이질감은 공들여 수집하고 오래 바라보고 매만진 작가의 시간과 손길에 의해 마치 새로운 화학작용이 일어난 듯 서로 스미어 한 덩어리가 된다. 전시장의 외부에 걸린 사진 속 작가는 머리에 뜨개천을 두르고 제주 바다를 향해 서있다. 이 뜨개물은 나를 숨기고 발 딛고 있는 곳의 기운과 정서에 작가 자신을 스며 들게 하는 제의의 도구와 같다. 이진아의 느린 호흡 속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관계 맺기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진정한 소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글: 곽현정 (독립큐레이터)
이진아 작가 정보